• [문태준의 마음 읽기] 정원과 석류 화분

    문태준 시인 제주에는 신록의 연둣빛이 눈부시다. 산빛은 해가 뜨는 아침에도 산뜻하고 잔양(殘陽)에도 그러하다. 수풀은 어떻게 이처럼 신선한 색채로 스스로를 곱게 꾸밀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새잎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리고 싹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주 출신의 문충성 시인이 시 ‘제주의 새봄’에서 “연둣빛 새봄이 와요 새봄이/ 잎 떨린 나뭇가지마다/ 물새들 물고 온 새 소식들 투욱 툭 전하면/ 소리 없이 연둣빛 웃음들 터뜨려요/ 그 웃음소리/ 바닷가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산으로 오롯 오롯/ 퍼져나가죠 연둣빛 그 웃음소리”라고 흥겹게 노래한 바로 그 신록의 세상이다.     ■  「 새봄 신록에 연둣빛 웃음소리 누구나 부지런해지는 계절 시간과 정성이 아름다움 빚어 」    김지윤 기자 활짝 핀 꽃 앞에 앉아 가만히 꽃을 바라볼 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금낭화는 금낭화대로 튤립은 튤립대로 특유의 모양과 빛깔로 자신만의 고유한 꽃을 피워내니 경이롭고, 또 해마다 제때에 그 자리에서 그 꽃을 피워내니 신기할 따름이다.   들판에는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보리가 일렁인다. 마치 저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오는 것처럼.   해는 점점 일찍 뜨고 해는 점점 늦게 진다. 낮에는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밤에는 소쩍새가 운다. 시골이라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럴 때면 밤의 허공이 올록볼록하다. 낮의 시간이 길어지니 게으른 사람도 부지런해진다. 동네 사람들의 손에는 호미며 곡괭이가 쥐어져 있고, 정원이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나도 조금은 덜 꾸물거리게 되었고, 조금은 더 몸을 놀려 움직이게 되었다. 챙이 크게 달린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선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또 화단을 가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혔다.   요즘 알게 된 것이지만, 제주에는 묘목과 화초를 파는 농원이 참 많다. 집집마다 꽃과 나무가 자라는, 크고 작은 정원이 있고, 또 정원을 아주 근사하게 잘 가꾸기 때문일 테다. 모두가 정원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집 안뜰 꽃밭에만 꽃을 심는 것이 아니라 집을 에두른 돌담 바깥에도, 동네 공터에도 꽃을 심어 기른다. 내 이웃집 부부도 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일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다. 나는 종종 이런저런 귀동냥으로 배우게 되는데, 며칠 전에는 꽃이 진 수선화 꽃대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꽃대는 지금 잘라주고 잎은 다 마른 후에 잘라주면 알뿌리가 실해진다고 일러주었다.   어느새 나도 집에서 가까운 농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봄을 맞아 묘목을 몇 그루 사기 위해 농원을 찾아갔다. 블루베리 묘목 여럿과 한라봉 묘목 여럿을 사서 돌아왔다. 밭에는 한라봉 나무 십여 그루가 자라는데 지난 겨울 한파에 네 그루가 고사하고 말았다. 밭에서 여러 해를 자랐고 그래서 해마다 잘 익은 열매를 얻었는데 네 그루씩이나 죽었으니 여간 아쉽지 않았다. 어린 묘목을 심어서 예전 그 나무만큼의 키와 품으로 키우려면 또 여러 해가 지나야 할 것이다.   한라봉 나무는 말라 죽었지만 그 뿌리는 엄청나게 컸고 땅속으로 깊숙이 뻗어 있었다. 죽은 한라봉 나무의 뿌리를 곡괭이로 캐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동네 어른 한 분이 지나가다 내게 말했다. “이따 내 집으로 잠깐 와요. 내가 한참 전에 약속은 해 놓고 아직 주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농원에서 사 온 한라봉 묘목을 심고 나서 그 어른 집엘 찾아갔다. 어른은 집터에 딸린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밭에 들어서며 헛기침을 한 차례 한 후 말했다. “과일나무를 아주 잘 키우셨네요. 요즘 밭일이 많으시지요?” 어른은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이젠 힘에 부치지 않을 정도로만 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곤 밭 한쪽에 있던 석류나무 화분 하나를 내게 건넸다. “석류나무 묘목을 나눠주겠다고 말을 해놓고 여태 주지 못했는데, 이게 이래 봬도 두 해를 키웠어요.” 화분에서 키운 어린 묘목이었지만 뿌리를 잘 내렸고, 줄기와 가지가 곧게 서고 잘 뻗어 있었다. 나는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두 해라고 하셨지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요, 거기에 내내 마음과 일손을 썼을 것을 생각하니 화분을 받아 안을 때에 가슴이 뭉클했다. 게다가 애초부터 잘 길러서 내게 주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하신 일이었으니 거기에는 노심초사하는 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폭염과 비바람과 한파도 여러 번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석류나무 묘목에는 그 어른의 따뜻한 배려심과 정성이 온전히 깃들어 있었다.   이즈음에 봄의 정원과 산빛이 보여주는 꽃과 신록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아껴 가꾼 것이요, 시간을 오래 들인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 어른은 내게 준 석류 화분을 통해 이 가르침을 한 번 더 알려주셨다.   문태준 시인     

    2024.04.17 00:28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여우비와 봄 모종

    문태준 시인 지난 일요일에 제주에는 봄비가 내렸다. 봄비의 빗방울이 유리창에 자분자분 떨어지는 소리에 새벽에 잠을 깼다. 누워서 그 소리를 한참 들었다. 간헐적이었지만 부드럽고 조용조용하고 찬찬했다. 봄비의 빗방울 소리는 마치 어르는 소리 같았다. 졸려서 칭얼대는 아이를 엄마가 달래듯이. 비는 낮에 그쳤다. 마치 봄 햇살의 기세에 밀린 듯이.   한 지인도 봄비에 시심(詩心)이 일었는지 윤동주 시인이 쓴 ‘햇비’라는 시를 내게 메시지로 보내왔다. 시의 첫 연은 이러하다. “아씨처럼 내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햇비는 여우비를 이르는 단어이니 볕이 든 날에 잠시 오다가 멎는 비를 일컫는다. 푸슬푸슬 내리는 비의 성품을 아씨에 빗대었다. 적은 양이지만 이 비 덕에 만물이 더 왕성하게 자란다고 보았다. 옥수숫대처럼 푸르게 높게 늠름하게 자란다고 썼다. 어쩌면 너무 큰 기대가 들어있는 듯도 하지만, 그만큼 고맙고 귀한 비라는 뜻이겠다. 윤동주 시인이 ‘겨울’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라고 겨울 절기를 노래한 것에 비하면 이 시 ‘햇비’에는 여우비를 노래했으나 오히려 봄 혹은 여름날의 햇살과 대기의 따뜻한 기운이 잘 느껴진다.     ■  「 자분자분 듣는 비에 봄 완연해져 귀하게 모종법 알려준 가게 주인 마음에도 빛 들이고 움 틔웠으면 」    마음 읽기 내 사는 집 주변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호미를 쥘 때가 되었다. 풀이 자라는 밭으로 들어설 때가 되었다. 이 집에서 또 저 집에서도 밭에 들어가 풀을 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날도 일찍 샌다. 마을에서 시내로 가는 첫차는 아침 6시 30분에 있는데, 그 첫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가는 사람이 어느 집 누구인지 짐작할 정도로 날이 환해지는 시간이 빨라졌다. 마을 청년회에서는 이번 주말에 벚꽃이 피는 때에 맞춰 마을 축제를 열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가 멎고 나서 오일장에 갔다. 톳과 물미역, 미나리를 파는 집을 지나 창포를 파는 가게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어린나무와 화초와 모종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백합 구근이 나와 있기에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백합 구근을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다 일어서 다른 가게로 갔다. 야생화 작은 화분을 몇 개 샀다. 그러고는 여러 종류의 모종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오이 모종과 고추 모종, 상추 모종을 샀다.   모종을 파는 가게 주인은 뜻밖의 말을 내게 건넸다. 꽃샘추위가 온다고 하니 당장에 모종을 심지 말고 이틀 밤을 집안에서 재운 후에 노지에 모종을 하라는 것이었고, 노지에 모종을 심은 후에라도 날이 추워지면 이렇게 해서 모종에 씌워주라며 밑을 자르고 뚜껑을 뗀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을 높이 들어 보였다. 밑을 절단하고 또 뚜껑을 제거해서 공기를 통하게 한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은 말하자면 작은 온실 같은 것이었다. 그 작은 온실에 의지해 모종은 각각 제 지닌 뿌리를 땅속에 내리고 바람을 피하며 볕을 받아 자라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턱대고 모종을 심은 후에 손을 놓고 기다리는 일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물의 생장을 도우려는 마음을 한시라도 쉬지 않는 것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일이 서툰 나에게 자상하게 일러준 가게 주인의 얘기는 이 새봄에 내가 받은, 무엇보다 소중한 말씀의 선물이었다.   나는 최근에 ‘물결-삽목(揷木)’이라는 졸시를 지었다. 시는 이렇게 짧게 적었다. “낮의 화초(花草) 가지를 잘라 밤의 검은 땅에 심는다// 돋은 눈이 막 터지기 전의 긴 미명(未明)// 삼월의 눈은 살쾡이처럼 한 차례 더 찾아오리라” 삽목의 경험을 살려 절기의 미묘한 이동을 함께 노래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삼월은 밤의 어두운 시간에 낮의 밝은 시간을 보태는 때이고, 삽목한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나기 직전의 때이며, 날이 밝아 올 무렵의 동쪽 하늘과도 같은 미명의 때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추위도 한차례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시간이 늘어나고 삽목을 한 화초 가지에 싹이 움트는 이런 변화의 에너지는 더 세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행간에는 삼월을 사는 이즈음의 마음도 화초 가지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배어 있을 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백합 구근을 망설이다 그만 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소심해서 구근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말았다. 사서 온 모종과 이틀을 살고, 그 모종을 심고, 과일나무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은 후에 장이 서는 날에 가서 백합 구근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봄볕이 백지처럼, 백합꽃의 흰 빛깔처럼 사방에 가득 내릴 것이다. 이 세계가 커다란 온실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 

    2024.03.20 00:28

  • [문태준의 마음 읽기] 리듬과 박동

    문태준 시인 시를 지으려면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는 경험은 나의 시심(詩心)을 일으켜 세우고 시심의 심장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몽골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몽골의 자연과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게르, 야생마와 초원, 고비의 모래 언덕, 가족 공동체와 사랑 등을 노래한 시편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어머니 자연”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감각과 깊은 사유에서 솟은 시편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말과 사막에 관한 표현은 모방할 수 없고, 지금껏 한 번도 이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처음의 것이었다.     ■  「 어머니 자연을 읊는 몽골 시편들 생활의 호흡과 생명의 밝은 광채 새봄에 틔울 마음의 맹아 생각해 」    김지윤 기자 가령 이스 돌람은 시 ‘경주마의 눈’에서 “수많은 경주마 앞에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선두로 달려오고 있는 경주마의 눈을 보라./ 광막한 지평선에/ 어둠이 서서히 열리고/ 먼 산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새벽의 금성이 그렇게 빛난다.”라고 썼다. 질주하고 있는 말의 눈빛과 새벽녘 금성이 내뿜는 광채를 연결시키면서 말이라는 하나의 생명 존재를 우주적 존재로 인식하는 큰 생각을 보여주었다. 몽골의 시인들이 자연을 통해 노래한 것은 인색함이라는 자물쇠가 없는 마음, 조금 더 자애로운 마음, 평온하고 순결하고 넓은 마음, 용기와 인내 등이었다.   시편들 가운데 더 많은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체 사롤보잉이 쓴 시구였다. 시 ‘만남’에서 거듭거듭 등장하는 시구였는데, 그것은 “생의 기운을 돌린/ 태양의 리듬/ 달의 박동이 있는/ 시간의 순환은/ 끝없는 세월의 연속”이라고 진술한 대목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태양으로부터 리듬을 주목했고, 또 달로부터는 박동을 주목했을지 궁금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낮이라는 시간 동안에 반복되는 노동, 그 생활의 호흡을 ‘태양의 리듬’이라고 표현했고, 밤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과 그 음성을 박동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활의 되풀이되는 호흡과 생명의 밝은 빛이 생의 기운이라니. 아무튼 이 시구를 접한 이후로 때때로, 아니 그보다 훨씬 잦게, 마치 화두(話頭)처럼 ‘태양의 리듬’ 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이 두 개의 말은 그리하여 요즘 내 사유의 첫머리요, 디딤돌이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에도 시간의 순환은 이어지고 있다. 겨울은 뒷등을 보이며 사라져가고, 저만치서 봄이 옷의 앞자락을 풀어헤치며 다가오고 있다. 봄을 맞이하는 때에 이른 것이다. 물론 한라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두어 차례 추위가 앞으로도 몰려오겠지만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라봉 나무에는 이제 새가 먹을 열매만 남겨져 있다. 가끔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살펴보니 새가 달콤한 맛을 즐기고 다녀갔는지 과육이 움푹 패여 있다. 식구들이 먹을 한라봉 열매는 집 뒤꼍에 큰 항아리를 묻어, 거기에 저장해두었다.   그저께는 한라봉 나무를 전정했다. 나보다 훨씬 농사에 밝은 이웃집 사람이 전정을 막 끝냈기에, 전정의 시기를 재던 나는 서둘러 가지를 잘라냈다. 이웃집의 농사를 따라서 하긴 했지만, 이웃집 사람만큼 대범하진 못해서 나무에 햇살이 사방에서 골고루 들 수 있을 정도로만 곁가지를 쳤다. 고향집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한 해의 일을 끝낸 나무에는 비료를 넉넉히 줘야 한다고 하셔서 또 그 말씀에 따라 비 오는 날에 모자라지 않게 비료를 뿌려주었다.   서툴지만 삽목(揷木)도 했다. 삽목은 잘라낸 가지나 줄기를 흙에 꽂아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인데 개체를 늘리는 일인 셈이다. 삽목법도 이웃집 사람에게 배웠다. 내 집과 이웃집에는 같은 종류의 화초가 더러 있다. 이웃집 화단에 고운 꽃이 피면서 근사하게 자라는 화초가 있으면 그 화초의 이름을 물어 그때마다 심었던 탓에 이제 이웃집 화단과 내 집 화단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웃집 사람이 어느 날 내 집 화단을 보게 된다면 빙긋이 웃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웃집 사람이 알려준 대로 잘라낸 줄기마다 두 개의 순이 남도록 해서 부드러운 흙 속에 묻었고, 물속에 담가두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삽목한 가지로부터 뿌리가 나오고 두 개의 눈, 즉 두 개의 맹아(萌芽)에 의지해 화초는 자라날 것이다.   삽목을 하다 보니 잘라낸 가지에 남겨놓은 두 개의 눈이 화초의 생장에 있어 어떤 시초이자 단초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맞이할 새봄에는 어떤 마음에 근거해 살아가야 할까를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시인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자애롭고 평온하고 순결하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도 좋을 것이요, ‘태양의 리듬’과 ‘달의 박동’이라는 두 개의 말을 내면의 갈피에 넣고 살아도 좋을 테다.   문태준 시인 

    2024.02.21 00:35

  • [문태준의 마음 읽기]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

    문태준 시인 그저께와 어제 제주에는 찬바람이 불고 싸라기눈과 함박눈이 내렸다. 산죽 푸른 잎에 싸라기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바람에 회오리가 있어서 담장 아래 수선화의 꽃대는 꺾여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서 버팀목으로 받쳐주었다.   시골 마을의 겨울밤은 더 적막하다. 그래서 작은 소리 하나도 벼락이 치는 듯이 크게 들려온다. 육지의 고향집에서 호두를 보내온 것이 있었는데, 어젯밤에는 호두를 깠다. 호두는 껍데기가 울퉁불퉁하고 단단해서 깨기가 쉽지 않았지만, 속이 꽉 차도록 잘 여문 것을 볼 적에는 흐뭇함이 있었고 또 그걸 겨울밤에 하나씩 까고 있으니 한적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한가한 마음의 한구석에는 이런저런, 소소하지만 인상적이었던 지난 일의 무늬가 만져지기도 했다.     ■  「 스스로 내 마음속 빛 찾았으면 지금의 기쁨은 충분히 누렸으면 수평선처럼 욕망 없이 담담하길 」    김지윤 기자 개중의 하나는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제주도 출신인 문충성 시인의 시집을 읽다 ‘생명(生命 1)-콩밭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발견한 시구였다. 시인은 우리가 “차가움 속에 나자빠져 얼마만 한 세월을 속 썩혀 왔나”라며 탄식했다. 그러면서 마치 한 알의 콩이 어둠의 땅속에서 “눈부신 빛”을 기어코 찾으려고 하듯이 그리하여 싹트듯이 “자그마한 기쁨의 씨앗들”이 깨어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 시구를 접했을 때 혹시 나는 나를 스스로 비탄과 절망의 흙 속에 자꾸자꾸 가두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자문했다.   다른 일화도 떠올랐다. 지난달에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몇몇 동기가 송년회 모임을 갖고 난 며칠 후였다. 송년회에 참석했던 친구 가운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송년회에 안 나온 사람 안부를 묻지 말고, 나온 사람 안부를 물어야 되는 거 아냐?”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송년회를 갖자고 모여선 정작 모임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 안부만 묻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친구의 말은 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이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 의미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인사와 반가움을 표현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누군가를 만나 내 앞에 그 사람을 마주하고서도 그와 속마음을 더 충분하게 얘기하지 않은 탓에 그와 헤어지고 돌아올 때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가령 내게 큰 기쁨이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온 큰 기쁨을 내 마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넉넉하게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여기 있으면서도 딴 데를 자꾸 서성이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은 얼마 전 모임에 갔다 주고받는 대화 중에 우연히 들은 말이었다. 연장자인 그 어른은 글을 쓰는 분이었는데, 연세가 팔순이 넘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이가 드니까 심심해져요. 바다를 보아도 세 해 전 바다와 달리 이제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게 잘 사신 겁니다. 나이가 들면 감정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 어른께서 말씀하신 심심하다는 것의 의미가 어쩌면 요즘에 도통 감흥이 적어 시심(詩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걱정의 고백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감정의 동요 없이 만사를 그저 예사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노경(老境)에 성취할 만한 높은 경지의 시심이기도 할 테니 분명 부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바라봄은 수평선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서 소개한 문충성 시인은 ‘수평선(水平線)’이라는 시에서 “인간이 사는 땅을 자애(慈愛)의 손길로 재우고 있는 수평선(水平線)”이라고 멋지게 썼다. 격랑 너머에서 한 줄 흰 줄로 세상의 둘레가 되는, 자애의 둘레가 되는 수평선처럼 감정과 욕망을 덜어낸 그 묵묵한 자리, 덤덤하게 된 그 마음씨라면 지혜와 깨달음의 식견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마음이 한적한 때에 이르러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새겨진 여럿의 무늬를 읽기도 한다. 그 무늬는 흐릿하고 잔잔한 것도 있고 짙고 격렬한 것도 있다. 화로의 불씨 같은 것도 있고 요즘의 바깥처럼 차가운 얼음 같은 것도 있다. 어젯밤에 나는 이 무늬 몇 개를 손으로 쓸어 어루만졌다. 그리고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고 있노라니 무늬는 삼가게 하고 엄숙하게 해 삶에 성스럽게 머무르게 했다.   밤이 제법 깊어서야 호두를 까는 일이 끝났다. 바람 소리는 비탈이 쏟아지는 듯이 훨씬 거칠어졌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일을 떠올리고 나니 내 마음도 집도 환한 빛이 감싸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면에 천리향 화분 하나를 기르고 있는 듯이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문태준 시인 

    2024.01.24 00:16

  • [문태준의 마음 읽기] 폭설과 연말의 시간을 살며

    문태준 시인 제주에는 지난주에 폭설이 내렸다. 어느 시간에는 흰 쌀알 같은 싸라기눈이 떨어지더니 또 어느 시간에는 눈보라가 매섭게 치고, 바람이 잦아들면 함박눈이 소복이 내렸다. 세계가 거대한 흰 빛 덩어리 같았다. 담장의 돌에도 흰 빛이 쌓이고, 오가는 길, 장독대, 지붕에도 흰 빛이 앉았다. 국화의 마른 꽃 마른 잎에, 막 꽃망울을 맺은 수선화에 흰 빛은 돌았다.   나는 눈이 올 때면 뒷집에 가서 텅 빈 마당을 한참 동안 지켜보곤 한다. 뒷집은 먼 친척의 집인데, 사람이 살지는 않는 빈집이다. 이 빈집 마당에 눈송이가 붐비는 것을 보곤 하는 것인데, 내리며 날리는 눈송이의 운동과 빈 마당의 오랜 적막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게 된다. 눈송이는 움직이고 또 움직이려고 하고, 고요를 견고하게 고집하는 빈 마당은 눈송이의 움직임을 묶어놓으려고 한다. 나는 눈이 오는 날에 본 이런 풍경과 정취를 졸시 ‘뒷집’을 통해 노래했다. 시는 이러하다.   “사람 없는 뒷집/ 빈 마당은/ 고요가 나던 곳// 오늘은 눈발 흩날려// 흰 털 새끼 고양이/ 다섯이/ 뛰는 듯// 움직이는/ 희색(喜色)// 그러나// 고요를 못 이겨/ 눈발이 멎다”     ■  「 폭설 내린 세계는 흰 빛 덩어리 소거와 재생의 시간 함께 살아 팔풍 불어도 우리 삶은 계속돼 」    마음 읽기 눈이 오고, 눈이 멎는 날을 살다 보면 두 개의 시간이 교체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하나는 눈송이가 내리고 쌓이는 시간이요, 또 하나는 쌓인 눈송이가 녹아 물이 되는 시간이다. 이 두 개의 시간은 물론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앞의 시간이 무언가를 단단하게 붙여서 꼭 봉하는 밀봉의 시간이라면 뒤의 시간은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여는 개봉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하므로 앞의 시간은 지워 없애는 소거(消去)의 시간이요, 뒤의 시간은 다시 살아나는 재생(再生)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연말의 시간과 다가올 신년의 시간도 앞서 말한 두 개의 시간에 견줄 수 있을 법하다. 눈송이는 한 해의 시간을 덮고 봉하고 잊게 하지만, 물이 되는 시간은 흰 빛이 사라지고 대지의 황토 빛이 다시 드러나면서 새로운 생명 활동과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한 해를 보내는 때에 이르러 돌아보니 크고 작은 일이 적지 않았다. 팔풍이 불었다. ‘종용록’에는 “팔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는데, 여덟 가지의 바람이 내게도 불었고, 그 팔풍에 마치 격랑에 휩싸인 배처럼 내심(內心)이 요동쳤다는 생각이다. 초연할 수가 없었다. 여덟 가지의 바람이란 자신에게 이로운 것, 자신에게 불리한 것. 나쁜 평판을 듣는 것, 좋은 평판을 듣는 것,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 남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거나 비판받는 것,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 즐거운 일을 겪는 것이 그것이다. 헤아려보면 고통스러운 일이 없지 않았다. 특히 관계의 인연이 다하는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뒤따랐다. 누군가 세연(世緣)이 다해 내 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슬픔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흙이 여기저기 조금씩 눈에 띄었다. 눈이 녹아 물이 되었기에 흙은 충분히 젖었고 심지어 비옥해 보였다. 텃밭에 심어놓은 파는 더욱 푸릇푸릇해 보였다. 파는 아무렇게나 심어 놓아도 뿌리를 내려 바로 선다고 하더니 폭설에도 오히려 더 자란 듯이 보였다. 늦가을까지 바질의 잎을 땄는데 이제 바질은 마치 다 털고 난 깻단처럼 그 선 자리에서 그대로 말랐다. 물기가 없다. 그래서 어제는 바질을 뽑았다. 하지만 바질의 씨앗이 땅 곳곳에 떨어져 굳이 바질 씨앗을 뿌리지 않더라도 새봄이 되면 곳곳에서 움트고 자라고 향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화단의 화초들의 마른 줄기도 잘랐다. 마른 꽃들의 푸석푸석한 얼굴을 떠나보냈다. 마른 줄기를 자르다 보니 벌써 밑동 쪽에는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거기에도 생멸(生滅)이 있구나 싶었다. 소거의 시간이 있었고 동시에 재생의 시간이 함께 있었다.   눈이 물로 바뀌는 시간이 되자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무거워져 곧 무너져 내릴 듯하고 눈보라가 칠 때는 새가 보이지 않더니 눈이 멎자 새가 가장 먼저 다시 날기 시작했다. 더 고음(高音)으로 우는 것 같았다. 맑고 명랑하게 빛나는 소리였다. 새들은 동백나무에도 내려앉았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동백나무에 앉아 붉은 동백꽃 곁에서 노래했다. 나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잔설을 치웠다.   폭설의 전후에도, 연말과 연시에도 생활은 계속된다. 귤밭에는 귤을 따느라 분주하다.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연락과 우편물을 받았고, 신년 달력도 배달되어 왔다. 눈송이가 세계를 하얗게 덮고, 또 그 눈송이가 물이 되는 동안에도 말이다. 그렇게 삶의 시간은 계속된다.   문태준 시인 

    2023.12.27 00:27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아침 이슬에 담긴 우주

    문태준 시인 가을이 깊어간다. 틈이 날 때마다 가을을 바라본다. 햇살 아래에 있는 하얀 억새를 바라본다. 사진에 담듯이, 그러나 육안으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작은 잎이 붉게 물든 담쟁이를 바라본다. 단단한 벽을 타고 올라가다 뻗어가길 멈춘 담쟁이를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덩굴을 걷는 사람을 바라본다. 덩굴은 꽤 말랐다. 나뭇가지에서, 밭담에서, 텃밭에서 마른 덩굴을 잡아 당겨가며 덩굴을 걷고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거기에 가을이 있고, 거기에 마음을 얹어본다. 풍경을 관조한다. 풍경 속에는 일어나는 것도 있고, 잠잠해지는 것도 있다. 가을빛의 미세한 이동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을빛 속에 마음을 넌지시 내려놓기도 한다. 그러면 소음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  「 가을 풍경 속에 내려놓은 마음 ‘자아의 소멸’을 경험하는 관조   제주 귤빛에서도 세상사 잊어 」    마음 읽기 최근에는 일본 시인 야마오 산세이의 시편을 읽었다. 그는 시 ‘고요함에 대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게 괭이질을 하다가/ 때로 그 허리를/ 짙푸른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은 구름이 몇 덩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 / 산은 고요하다/ 구름은 고요하다/ 땅은 고요하다/ 벌이가 되지 않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설령 큰 벌이는 되지 못하더라도 고요함을 지니면서 사는 일에 시인은 의미를 둔다. 천천히 흘러가는 작은 구름을 보듯이, 짙푸른 산을 보듯이 그렇게 관조할 때 우리도 고요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조의 계절은 단연 지금 이 가을의 시간일 것이다.   제주에는 ‘물방울의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사진) 화백의 미술관이 있다. 김창열 화백이 자신의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해 세워졌다. 나는 얼마 전 미술관을 찾았다. 기획전 ‘관조의 물방울’을 개최하고 있었다. 기획전을 열면서 미술관에서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김창열미술관도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인위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라면서 “김창열의 물방울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단순한 물방울 그 자체로의 형태가 아닌 그 안에 각양각색 다양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나는 김창열 화백이 그린 최초의 물방울 그림인 ‘밤에 일어난 일’ 앞에 오래 머무르며 작품을 바라보았다. 검은 바탕의 화폭에 물방울 하나를 그린 그림이었다. 김창열 화백은 이 그림에 대해 어느 날 그림 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것에서 회화의 모든 답을 찾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검은 밤과 대비되는 투명한 하나의 결정체로서의 물방울을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이 그림의 탄생을 이끈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관조일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의 물방울 속에 온 세계가 투영된 것을 관조하다 보니 나라는 생각과 나라는 고집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온도 마음에 잠시 깃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김창열 화백이 지향했던 ‘에고의 소멸’이 아닐까 싶었다.   이 가을에 내가 더 특별하게 감각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귤의 빛깔이다. 노지의 감귤은 수확의 시기를 맞았다. 귤을 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귤나무에서 딴 귤을 상품과 하품으로 선별하는 손길도 바쁘다. 이웃에서는 귤을 처음 땄다면서 노랗고 탱글탱글한 귤을 상자에 가득 담아 내 집에 갖다 주었다. 나는 귤나무에 매달린 귤들의 각각의 높이와 색감을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낮은 곳에, 꼭대기에, 햇살이 잘 드는 곳에, 그늘이 진 곳에 귤은 매달려 있다. 귤은 마치 걸음을 천천히 옮기듯이 노랗게 익고 있다. 귤은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는 것처럼 무르익고 있다. 더디지만 조금씩의 진전 속에 가을의 시간이 있다. 귤빛 가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또 하나는 아침 이슬이다. 이슬이 떨어져 흙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화단에도 이슬이 내려 국화의 꽃이 젖어 있다. 이슬에 젖은 꽃은 색이 선명하고, 그래서 생기가 있고, 더 이쁘다. 나는 꽃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꽃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한다. 국화에, 한 방울의 이슬에 가을이 들어 있다. 국화도 우주요, 한 방울의 이슬도 우주이다. 아, 나는 가을의 아침 이슬 속에 있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을 조용한 거품 안에 가둬요.” 이 말은 영화 ‘디터 람스’에서 한 평론가가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의 성품과 삶의 태도를 평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조용한 거품이라니. 물방울 속에 들어 있는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고, 관조하는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고, 평온과 자족을 얻은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다. 우리도 관조하기에 좋은 가을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문태준 시인 

    2023.11.01 00:28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초등생 동시에서 확인한 반려

    문태준 시인 말과 글에는 각각의 빛깔과 향기가 있다. 그래서 은연중에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나 누군가의 글을 볼 때 특별한 느낌이 들게 된다. 가령 언젠가 나는 “이리 와서 앉아봐. 내 말 좀 들어봐”라고 누군가가 말했을 때 뭔가 이 말이 매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글로부터도 신선한 느낌을 예민하게 받게 되는데, 초등학생이 쓴 동시로부터 그러한 인상을 종종 얻기도 한다.     ■  「 불안도 돌보는 게 진정한 반려 원한과 복수는 약한 자의 감정 선악은 함께 짓고 함께 받는 것 」    마음 읽기 얼마 전 부산 혜원정사에서 개최한 백일장 심사에 다녀왔다. 혜원정사의 백일장은 올해로 26회째를 맞았다. 혜원정사 주지 원허 스님은 코로나가 대유행일 때에도 백일장을 공모 형식으로 바꿔 치를 정도로 백일장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분이다. 1997년부터 초중고생 대상의 백일장을 열어왔으니 절에서 개최하는 백일장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관련해 두 가지를 주문했다. 하나는 곧바로 문장을 짓지 말고 집을 지을 때 우리가 먼저 설계를 하고, 또 집 짓는 데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듯이 마음속으로 내가 쓸 문장의 집을 한 번 미리 떠올려보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두 시간이 지난 후에 학생들이 쓴 작품이 모였고, 나는 초중고 학생들이 쓴 시들을 읽으며 심사를 했다. 시제(詩題)는 ‘반려’와 ‘쉼’이었다. 올해에도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좋은 시편이 많았다.   ‘반려’를 제목으로 해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지었다. ‘반려도 생명이 있다./ 반려도 생각이 있다./ 반려도 친구가 있다./ 반려도 사람처럼 대해주어야 한다./ 반려는 장난감이 아니다.’ 초등학생이 어쩌면 이렇게 큰 생각을 단단하게 지닐 수 있을까 싶어 대견했다. 반려의 대상이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햄스터인지 어항 속 물고기인지 구체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누군가와 짝이 되는 동무가 되려면 그 누군가를 온몸과 전심(全心)으로 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강아지’라고 제목을 붙인 한 초등학생의 작품은 이러했다. ‘강아지를 안으면/ 기분이 좋다/ 강아지도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나도 좋아서 헤헤/ 내 강아지는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면 뭉! 뭉!/ 나와 강아지는 단짝.’ 아이와 강아지 사이에 오가는 썩 좋은 기분을 ‘살랑살랑’과 ‘헤헤’라는 시어를 통해 드러내었는데, 특히 강아지가 짓는 소리를 ‘뭉! 뭉!’이라고 쓴 대목에서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강아지가 짓는 소리가 ‘멍! 멍!’으로만 단일하게 들리는 것은 결코 아닐 테다.   한 학생이 쓴 동시를 한 편만 더 소개하자면, 이 학생은 제목을 ‘강아지’라고 달았는데 이렇게 시를 지었다. ‘강아지 털이/ 복슬 복슬/ 포근 포근/(…)/ 강아지 장난감은 삑! 삑!/ 강아지를 키우면/ 다양한 것을 느낄 수 있어/ 강아지를 포근하게 안아주면/ 강아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사람도 강아지를 키우면/ 행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어/ 강아지도 불안감을 느껴/ 잘 보살펴줘야 돼/(…)/ 마루야 사랑해!’   이 학생의 반려견 이름은 ‘마루’인 듯했다. 강아지를 노래하되 강아지가 갖고 노는 장남감 소리까지 세세하게 예로 들고 있어서 너무나 기발했고, 강아지를 반려로 해서 살아갈 때는 강아지가 느낄 수 있는 불안감까지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의젓했다. 아이들의 맑고, 밝고, 재치가 있는 글을 읽는 시간 내내 참으로 행복했다.   반려는 함께 산다는 뜻이니 이 말 속에는 수직적인 관계가 들어 있지 않다. 공존의 의미만이 담겨있다. 내가 요즘 아끼는 말 가운데 ‘공업(共業)’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의미는 공동으로 선악(善惡)의 업(業)을 지으면 그에 따라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결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는 개인이 혼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얽혀서 주고받으며 함께 이웃해서, 서로에게 반려가 되어 산다는 맥락이 강조되어 있다.   지난주 토요일에 정목 스님의 강연회가 제주에서 있었다. 스님의 강연을 들으며 메모를 했는데, 이런 말씀이 있었다. “원한을 갖지 않아야 해요. 언젠가 복수하겠다는 생각이나 ‘네가 나를 망신을 줬어? 두고 봐, 반드시 갚아줄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건 약자의 감정이에요. 허약한 사람의 감정이지 주인의 감정이 아니에요. 그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과 그가 행복하도록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주인의 생각이에요.” 스님의 말씀은 공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최근 며칠은 반려와 공업이라는 말의 뜻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날이었다.   문태준 시인 

    2023.09.06 00:21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우리의 삶에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문태준 시인 장마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제주에도 꽤 많은 비가 내렸다. 땅이 마르기 전에 비가 내렸고, 웅덩이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또 비가 내렸다. 물 위에 물을 보탰다. 비가 연일 오니 몸도 마음도 축축하게 젖은 것만 같다.   빗줄기가 세져 빗물이 땅 위로 넘치면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고 물길을 내러 나갔다. 위쪽 밭에서 물이 넘어오지 않는지도 살폈다. 쓰러진 화초와 작물도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잠시 비가 멎으면 내 집뿐만 아니라 동네 집집이 풀을 뽑았고,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바람에 헝클어진 것들이 그렇게 틈틈이 조금씩 회복되고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  「 빗소리 가득한 장마의 나날들 밤에는 맹꽁이 소리 왁자지껄 큰비에도 꽃은 피고 열매 맺어 궂은 일도 괜찮다고 여겼으면 」    마음 읽기 비가 오려고 할 적에는 기미와 전조가 없지 않다. 제비들은 아주 낮게 난다.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즐긴다. 바람은 가볍고 보드랍게 자꾸 일어 풀이며 꽃을 민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면 널었던 빨래를 걷고, 이것저것 내놓았던 것을 창고로 옮겨 넣어두고, 마당을 쓸고, 텃밭에 비료를 뿌리기도 한다. 비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구름과 바람이 활동하는 것을 읽어가며 거기에 맞춰 나도 움직이는 것이다.   최하림 시인의 시 가운데 ‘장마’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밤새 앞 강물이 크게 불었다. 서시천의 다리가 물에 잠기고, 들과 마을의 구별이 없어지니 물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 이따금씩 바람이 떼 지어 지나가고 구름이 모여들어 꺼매진 하늘이 개울에 비쳤다. 뿌리 뽑힌 잡초들도 떠밀려갔다. 어머니는 그런 풍경이 두려운 듯 부엌에서 마루로 곳간으로 종종걸음치고, 그때면 수양버들도 가지를 솟구치며 하늘에 길을 내어 새들을 날게 하였다.’   큰비가 내려 온 세상에 물이 가득하면 사람의 마음도 불안해지고, 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애가 타고 조마조마해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서두르고 급히 걷는 걸음을 통해 드러냈다. 장마 때에는 누군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이면 맹꽁이 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시골에 살면서 여름날에 다시 보고 듣게 된 것 중에 단연 반딧불이와 맹꽁이 우는 소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 고향에서 만났던 것들이다. 이 빛과 이 소리는 보고 들을수록 참으로 신묘했다. 이들은 나를 더 깨끗한 자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려는 것만 같았다. 훼손되지 않은 본래의 자연 속으로, 사람과 문명의 손이 덜 닿은 자연 속으로 나의 이목을 끌어 데려가 보이려는 것만 같았다. 맹꽁이 소리가 끊이지 않고 왁자해서 처음에는 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그것을 자연의 멋진 음악으로, 자연의 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게도 되었다.   젖은 옷을 입고 사는 듯한 장마철에도 산뜻한 일은 일어난다. 그제 옆집에서 참외를 큰 그릇에 담아 들고 왔다. 장에 가서 샀더니 단맛이 잘 들었다며 나눠 먹자고 했다. 나는 그 그릇에 옥수수를 담아 손에 들려 드렸다. 일일이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옥수수수염을 떼 놓았던 것을 한 차례 쪄서 맛을 보시라고 드렸다. 잔잔한 미소가 서로에게 오갔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요란하게 불어도 해바라기는 노랗게 피었다. 작년에 자랐던 곳에 씨가 떨어져 스스로 발아하고 자라더니 꽃을 근사하게 피웠다. 올해 처음으로 참외 모종과 수박 모종을 텃밭 한쪽에 심었는데, 어제 보니 주먹만한 수박이 열려 있었다. 해바라기와 수박을 보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우레가 지나갈 때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나가는 그 생명의 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 마당에서 보이는 무화과나무밭에는 무화과 열매가 제법 커가고도 있었다. 개중에는 벌써 익은 것도 눈에 띄었는데 산새 한 마리가 무화과나무 가지에 앉아 열매를 쪼아가며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장마가 지나가고 불볕더위가 찾아오면 머잖아 무화과를 하나둘씩 수확할 수 있을 듯했다.   큰 밭에서는 사람들이 노지 수박을 따고 있었다. 지나가며 생각하길, 저 밭에서 막 딴 수박을 한 통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장마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이렇게 비바람과 함께 여름의 자연은 성장할 것이다.   이승훈 시인의 유고시집에는 ‘무엇이 움직이는가’라는 시편이 실려 있다. 시인은 ‘그럼 됐다. 그럼 됐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릎을 펼 수 있는 작은 정자면 된다. 나처럼 병이 든 노인이 걷다가 잠시 무릎이나 펴고 앉으면 된다’라고 썼다.   당신의 처지를 낮춰서 말하고 있는 이 시구에는 자족이 잘 느껴진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너무 상황이 나쁘다고 여기지도 말고, 이만하면 됐다고, 그럼 됐다고, 그런 일도 있으려니 생각할 일이다. 지루한 장마의 때를 살면서도 젖은 것은 젖은 대로 보고, 마른 것은 마른 대로 볼 일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문태준 시인 

    2023.07.12 00:50

  • [문태준의 마음 읽기] 여름 초입의 시간을 살며

    문태준 시인 지난 일요일 아침에 제주 애월읍 한담해변을 산책했다. 하얀 목덜미의 파도가 멀리서 밀려와 부서지고 되돌아가고, 하얀 모래가 쌓인 백사장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백사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사람들은 신발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또 바짓단을 걷어서는 긴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나도 고운 모래알이 깔린 해변을 맨발로 걸었다. 바닷물에 반복해서 적셔지고 이내 반복해서 마르는 발등을 내려 보면서 걸었다. 아이들은 모래를 파내거나 쌓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서퍼들도 더러 보였다. 파도 위에 올라서지 못해 곧바로 물에 빠지곤 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밀려올 파도를 다시 기다렸다.     ■  「 해변에도 산간 밭에도 초여름 자연의 왕성한 변화 놀라울 뿐 생명과 함께하는 건 좋은 거래 」    마음 읽기 산책하고 근처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노부부가 주인인 식당이었는데 가끔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식당 마당에 내놓은 들마루 한쪽에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뒷집 사는 두부예요. 심심해서 마실 나왔어요’라고 씌어 있었다. 여쭤보니 두부는 뒷집에 사는 강아지라고 했다. 뒷집 사람이 낮 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두부가 이곳에 와서 있다가 간다고 했다. 두부는 아직 와 있지 않았지만 오늘 낮에, 또 앞으로 맞이할 여름날의 무료한 낮에 두부는 이곳으로 놀러 올 것이다. ‘심심해서’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여름날의 낮의 뜨거운 일광(日光)과 바람 한 점 없는 대기의 정체와 그로 인한 나른함이 절로 느껴졌다. 식당 마당에는 채마밭이 딸려 있었는데 푸릇푸릇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쪽을 보았더니 이 밭 저 밭에서 벌써 옥수수가 익고 있었다. 옥수수의 끝에 엉켜있는 옥수수수염이 붉은 갈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떤 밭에서는 수박 넝쿨이 땅바닥을 기어가며 뻗고 있었다. 작년에 이 밭에서 갓 딴 수박을 산 적이 있었다. 하지가 내일모레이니 태양 아래 옥수수도 수박도 영글어 갈 것이다.   집에 와서는 장화를 신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모자를 머리에 얹어 텃밭에서 풀을 뽑았다. 토마토와 오이에 댔던 지지대를 더 큰 것으로 바꾸고, 가지에 북을 주었더니 온몸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텃밭에 들어가 있으면 정말이지 흙에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다양하고 드라마틱한지를 잘 느끼게 된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방울토마토를 땄고, 상추와 치커리와 방풍잎 등속을 거둬 찬물에 씻어 그릇에 담고 나니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작은 화단에는 올해에도 수국과 노란 낮달맞이꽃이 피었다. 시골에 사는 게 여전히 서툴지만 작년보다 기르는 가짓수가 늘었다. 여름을 위한 씨앗도 미리 준비할 줄을 알게도 되었다.   자연의 주체를 보다 가까이 접촉하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시인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시 가운데 ‘거래’라는 시가 있다. 시는 이러하다. ‘우리 정원의 죽은 살구나무/ 서 있도록 받쳐주고/ 둥치를 감고 오를 담쟁이덩굴을 심었더니/ 곧 나무는 이파리로 뒤덮였네.// 이제/ 우리 살구나무는 푸르러./ 심지어 12월에도.// 이것이 거래:/ 죽음이 뿌리와 열매를 갖고/ 우리는 위조된 푸른 잎을 가졌지.’   정원에 살구나무가 고사한 채 서 있는 것을 보고선 담쟁이덩굴을 심어 그 덩굴이 죽은 살구나무의 둥치와 줄기를 타고 자라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살구나무는 죽음 대신 뿌리와 열매를 갖게 되었고, 시인은 마치 그것이 살구나무의 것인 듯 푸른 잎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이 거래를 시인은 제법 훌륭하다고 여긴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거래는 죽음의 불모지를 푸른 생명의 빛으로 덮어 생명의 활발한 에너지를 우리의 살림 공간에 불어넣는 행위이기 때문일 테다.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감각하는 일은 우리의 생활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자극을 얻으려면 우리도 자연을 이루는 주체들의 변화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류선열 시인은 동시집을 내면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수백 가지 새나 들꽃의 이름을 지어낸 조상들을 위해 글을 쓰자. 냉이꽃이건 산수유건 노란꽃이라 하고 피라미건 배가사리건 그냥 물고기라고만 부르는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자.’ 냉이꽃은 냉이꽃으로, 산수유는 산수유로, 피라미는 피라미로, 배가사리는 배가사리로, 그렇게 각각 이름으로 호명해야 하고 또 개별적인 움직임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비둘기가 울고, 뻐꾸기가 이어서 울고, 옥수수가 익어가고, 수박 넝쿨이 땅을 기어가고, 해바라기의 키가 커가고, 대낮의 시간이 길어지고, 목에 두른 수건이 흠뻑 젖어 있으니, 이즈음을 여름의 얼굴이 설핏설핏 보이는 때라고 해야겠다.   문태준 시인 

    2023.06.14 00:50

  • [문태준의 마음 읽기] 더 열심히 웃어야겠다

    문태준 시인 얼마 전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수덕사에 다녀왔다. 평소에 모시던 도신 스님의 수덕사 주지 취임식이 있었다. 도신 스님은 ‘노래하는 수행자’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여덟 살 나이에 수덕사로 입산해 인곡당 법장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동안 정규 앨범 발매는 물론 많은 공연을 하셨다. 스님은 시를 창작하고, 또 등단한 후 시집도 발간하셨다. 나는 스님의 시편을 읽을 때마다 범종 소리가 울려 퍼져오는 것을 느꼈다.   취임식에서 덕숭총림 방장인 달하 우송 대종사의 법문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감명적이었다. 스님은 절의 주지 소임이 “문수보살의 큰 지혜, 보현보살의 큰 행원으로 마당을 쓸고, 설거지하고, 웃어주고, 손을 잡아 주는 데에 솔선수범하는 것이 주지의 일입니다. 생명의 뿌리를 찾아주는 일이 주지의 역할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수행자가 사는 곳은 지심(至心)이라고 강조하셨다.     ■  「 “웃는 게 주지의 일” 노스님 법문 마음이 바짝 마르면 화도 잦아 웃음은 생명의 뿌리를 찾는 일 」    마음 읽기 주지의 소임 자리가 낮은 곳에 있고, 보살피고 모시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요, 수행자의 본분은 더없이 성실하고 또 한결같은 일심(一心)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이 주지 소임을 시작하는 도신 스님에게 들려주는 당부이지만, 참석한 대중 또한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가해와 하대가 빈번한 이 세태에 울리는 경종으로 여겨졌다.   도신 스님의 시 가운데 ‘꽉 찬 빈 그릇’이라는 시가 있다. ‘그때도/ 여름이었어/ 비도 내리고// 쌀이 귀하던 시절/ 그게 들어온 거야// 노스님 밥 지어/ 동자들과/ 공양했는데// 노스님은/ 숟가락 소리만 컸어// 빈 그릇을/ 꿀밥처럼 드신 거지// 노스님 가시고/ 삼십여 년/ 쌀밥 보니 눈물 나네// 동자들/ 쌀밥 먹이고/ 누룽지 긁으셨대/ 참 나// 그 사랑 때문에/ 함부로 못 살았어/ 그럴 수밖에…’   이 시는 노스님의 일화를 시로 쓴 것일 텐데, 쌀이 귀하던 때에 절에 쌀이 들어와 밥을 지어 어린 동자들을 먼저 먹이고 자신은 누룽지를 긁어먹어 허기를 해결한 노스님의 그 모습이야말로 바로 하심(下心)의 구현이요, 또한 생명의 뿌리를 찾아주는 귀한 일임에 분명할 것이다.   나는 도신 스님을 뵐 때마다 이런저런 말씀을 듣게 된다. 가령 스님께서는 “여기 빈 잔이 있다고 하면, 그걸 바람으로 채우면 굳이 비우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러나 물질이나 욕심으로 채우면 그걸 비워야 빈 잔이 됩니다. 비울 일이 없어야 잠도 깊이 잡니다. 또 마음이라는 것도 그래요. 마음이 바짝 마른 사람은 불이 잘 붙습니다”라고 어느 날에 내게 일러주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서 무욕과 허심, 호의와 관대함, 그리고 고요하게 제어한 마음을 지니는 것에 대해 여러 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이 바짝 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궁리했다. 아마도 마음이 바짝 마른 사람은 분노가 많은 사람, 덜 유연한 사람, 어떤 여지가 적은 사람, 자기중심의 아집이 많은 사람,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한 사람은 대개 그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태우게 될 것이다. 마음을 태우므로 스스로 자초하여 불행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특히 화를 내는 일에 대해 불교에서는 한순간 화를 내게 되면 마음에 백만 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며 각별히 경계한다. 마음이 바짝 마른 사람이 될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도신 스님은 최근에 첫 산문집을 펴내셨다. 산문집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긴 시간을 거쳐 웃는 것을 익히고 닦았습니다. 드디어 내가 웃자 나무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아무리 두터운 어둠일지라도 내가 웃으면 그곳에 반짝이는 별이 생깁니다. 별은 공간을 빛으로 가득 채워 어둠을 소멸시켰습니다. 아, 내가 웃어야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웃어야 별이 빛난다는 문장은 웃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내가 웃는 사람이 되고, 내가 웃는 사람이 되면 관계하는 존재도 함께 웃는 존재가 된다는 뜻일 테다. 내가 존엄한 존재임을 알되 내가 이 생명 세계 존재의 안락과 행복을 보호하고 가꿔야 한다는 뜻일 테다. 인용한 문장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처럼 도신 스님은 웃는 연습을 할 것을 자주 강조하신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의 마음일세.” 불교의 말씀 가운데 나는 이 말씀을 특별하게 좋아한다. 이해하기로는 쉽지만, 생활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거리에 내걸린 연등을 바라보면서 겸손하게 모든 존재를 대하고, 다른 생명의 뿌리를 찾아주는 일을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본다. 생활하면서 웃는 연습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문태준 시인 

    2023.05.17 00:46

  • [문태준의 마음 읽기] 금은처럼 반짝이는 일상의 음악

    문태준 시인 봄날이 되니 문득문득 고향 김천이 눈에 선하다. 옛날에 고향에서 보고 들은 것도 함께 보인다. 꽃 핀 앵두나무, 풀이 돋은 동산, 외할머니의 나직한 음성, 들판으로 난 길, 저수지와 돌돌 흐르는 시냇물, 경운기 소리, 새와 염소의 울음소리, 막 뜯어온 산나물을 삶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는 소리, 소를 몰고 돌아오는 저녁 등이 눈에 보이고 또 들린다. 나른하고 평화로웠던 봄의 시간이 보인다.   이상국 시인의 시집에서 만난 시 ‘봄날 옛집에 가다’를 읽을 적에는 고향 생각에 마음이 더 애틋했다.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 제주의 봄 물들이는 바람과 새 어릴 적 고향 김천 풍경 떠올라 빗소리 좋아한 음악가 사카모토 ‘생명의 음악’ 유심히 들어보자 」    지난 2009년 10월28일 이탈리아 로마의 공연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사카모토 류이치. [AP] 파 껍질 속 같은 엷은 그늘에서 마른 옷가지를 접어 포개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다는 구실로 자주 찾아오지 못한 옛집에서 원추리꽃으로부터 한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옛집에 묵으며 보낸 봄밤은 시인에게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봄의 기운이 뚜렷하니 이 세계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사는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의 아침도 보다 극적이다. 그저께는 바람이 한 점 없어 나무들의 가지와 잎들이 미동도 없이 고요한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며칠 전에 심은 상추와 토마토와 가지의 모종들이 그 실뿌리를 땅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내리는 소리조차 들릴 것만 같았다.   반면에 꿩과 직박구리와 닭의 울음소리가 숲과 마당으로부터 크게 들려왔다. 일찍 일어난 이웃집 사람들이 주고받는 밝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막 해는 떠오르고 있었고, 이 세계의 소리가 금은(金銀)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봄날 아침에 이렇게 많은 소리가 살고 있었다니 놀랄 정도였다. 나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이 소리를 금은처럼 귀하게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우리의 일상은 많은 소리로 이뤄져 있다. 어떤 소리는 곱고 어떤 소리는 거칠다. 어떤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면서 멀리 가고, 어떤 소리는 떨어진 단추처럼 툭, 아래로 곧바로 직하한다. 어떤 소리는 급하고, 어떤 소리는 느긋하다. 그러나 이 각각의 소리는 생명 세계의 현상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명의 음악이다.   일상의 소리를 음악으로 끌어들인 음악가로 사카모토 류이치가 있다. 그는 얼마 전 별세했다. 나는 그의 부음을 듣고 여러 날 그의 음악을 다시 들었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었던, 세계적인 음악가였다.   그의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간 세계나 현재의 일과는 조금 동떨어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조작하거나 조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가만가만 늘어놓고 찬찬히 바라본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꽤 오래전에 그의 음악 세계와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양동이를 뒤집어쓰고서 빗소리를 채집하고, 빙하가 녹아 흘러가는 물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리를 음악 속에 넣고자 했다. 그에게는 소음과 음악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소리가 많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빗소리겠죠. 세상에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소리가 넘쳐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만든 음악이 없어도 주변에 존재하는 소리만 즐기면서도 살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만큼이나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는 게 매우 즐겁습니다.”   내 귓가에 아직도 맴도는 정겨운 소리가 여럿 있다. 동산에서 또래들과 노느라 서산으로 해 떨어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밥 먹을 때가 되었다고 누나가 나의 이름을 길게 부르던 소리며 어머니께서 수확한 팥을 차르륵 키질하는 소리며 하얀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는 소리며 빈 마당에 들어서던 신발 끄는 소리며 바람에 댓잎이 서걱대는 소리 등은 내 머릿속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는 회전하는 것이 굉장히 많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자연 속에서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이 봄날에 생명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봄날을 구성하는 소리를 유심하게 들어보아도 좋겠다. 금은 같은 생명의 소리를, 일상의 음악을 말이다.   문태준 시인 

    2023.04.19 00:33

  • [문태준의 마음 읽기] 봄의 세계

    문태준 시인. 봄의 계절이다. 연둣빛 세력이 왕성하다. 안도현 시인은 한 문장에서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라고 이 계절의 신선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고향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씨감자를 사러 시장에 가려던 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식구들은 텃밭 일을 하시는 것조차 염려하지만, 땅을 놀릴 수 없으니 올해만 더 짓겠다며 또 텃밭 일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고향 집 집터에 딸린 작은 밭에는 어머니의 감자가 열리고, 고추가 붉게 익고, 부추와 대파가 푸르게 서고, 속이 찬 배추가 자랄 것이다. 이정록 시인이 시 ‘삽’에서 ‘농부는/ 삽을 뒤춤에 챙기고/ 물의 수평을 잡고/ 고랑과 이랑의 춤사위를 가늠한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어머니는 새봄에도 농부의 일을 위해 앙상한 두 팔을 걷어붙이신다.     ■  「 씨감자 심는다는 어머니의 봄 봄은 연둣빛과 꽃의 대향연   소생 못 하는 것에 애상도 커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어머니는 내일 동네에 부역이 있어서 나가보려고 한다고도 하셨다. 봄맞이 청소를 하는데, 어머니는 새참으로 내놓을 국수를 삶는 일을 돕겠다고 하셨다. 내 고향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손을 모아서 하는 공동 부역이 가끔 있다. 마을에 논의할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열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일일이 묻기도 한다. 물론 전원생활을 배경으로 한 연속극에서 보았던 그 확성기도 있어서 이장님의 육성으로 하는 안내 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내 어렸을 적에는 이장님 댁에 유선전화가 한 대 있어서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그것을 알리려고 확성기 안내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밭일을 하다가도 그 방송을 듣고 전화를 받으러 가던 일이 있었다. 이제는 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튼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근황을 통해 고향 마을의 봄 풍경을 눈에 선하게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는 수령이 많은 왕벚꽃나무들이 있다. 벌써 꽃망울이 맺혀 내일모레면 피기 시작할 것 같다. 마을에서는 이번 주말에 왕벚꽃축제를 연다고 한다. 비록 나는 이주해 온 사람이지만, 마을에서 하는 일들에 점차 손을 보태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전리 마을에도 확성기 안내 방송 소리가 내 집 앞마당까지 들려오곤 한다. 요즘은 휴대전화나 여럿이 정보를 나누는 메신저 채팅방을 많이 이용해서 마을 공동체에서 하는 확성기 방송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알림의 방식이 더 정감이 있기도 하다.   봄은 돌아와 꽃은 여기저기서 핀다. 꽃이 진 그 자리에 다시 움이 트고 꽃은 핀다. 물기를 꼭 쥐어짜 놓은 것 같은 마른 꽃과 줄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새로운 싹이 올라온다. 그 싹도 머잖아 꽃봉오리를 지닐 것이다. 생명 세계의 순환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는 이러한 감흥을 졸시 ‘꽃과 식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게 꽃은 생몰연도가 없네/ 옛 봄에서 새봄으로 이어질 뿐// 꽃아/ 너와 살자// 우리의 가난이 마주 앉은 이 저녁의 낡은 식탁 위/ 꽃은 신(神)의 영원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네.’   봄이 되어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이 우리가 비록 지금 가난하고 어려운 때를 살더라도 우리의 삶에도 꽃의 시절이 곧 도래할 것임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봄의 세계가 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봄의 연둣빛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활착(活着)하는 것은 아닐 테다. 봄의 낮과 밤에 애상(哀傷)이 눈뜨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서안나 시인의 ‘애월 1’이라는 시를 읽고 감정이 북받치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넓은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늙은 딸이/ 찬밥에 물을 말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정원 잔디밭에/ 잡풀이 귀신처럼/ 달려와 자라고// 어머니는/ 오래된 집처럼/ 천천히/ 눈과 귀가 멀어간다// 어디선가/ 야생 곰취 냄새가 난다/ 안방 낡은/ 화장대 위에// 폐가 아픈/ 나무 원앙// 피가 돌아/ 교교교교 운다.’   서안나 시인은 “시는 익숙한 세계에 낯선 목소리의 진동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시는 봄날의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늙은 어머니와 딸이 사는 집은 크고 크지만 적막 또한 크다. 아버지의 부재는 이 집을 더 텅 빈 듯이 만든다. 시인은 입맛이 돌지 않아 물에 찬밥을 말아먹고, 정원의 잔디밭을 가만히 바라본다. 풀이 올라오고 있다. 정원의 잔디밭에도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고운 봄빛이라고 하더라도 무너지고 쇠하고 잃은 것을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오래된 의자 하나를 봄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다. 더러는 이곳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화단의 꽃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더 그리운 것들도 생각날 것이다. 그리하여 봄밤이 한없이 아득하고 깊고 깊다는 것을 또 느끼게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 

    2023.03.22 00:40